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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아나셨고, 먼저 가시나니,
거기서 뵈오리라 막 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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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자 제자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⑴ 제자들은 슬프고
괴로웠다. 자신들과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한 식구로 지냈던 예수님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스승이자 가족보다도
더 가까웠던 친구인 예수님이,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⑵ 제자들은
실망하고 낙담했다.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고,
온갖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좇아내시며,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 놀라운
능력의 예수님이,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고 이스라엘의 메시아라고
믿었던 예수님이, 남은커녕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죽으셨기
때문이다. ⑶ 제자들은 또한 두렵고
불안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이제는
자신들도 잡아 죽일 것 같았고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도망갔던
12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3일째 되는 일요일 아침에도
여전히 모두 숨어있었다.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3번이나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주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3일만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은
기억했다. 마
27:62-66에 기록된 대로,
이들은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 시체를 훔쳐간 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이들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의 무덤을 돌로 인봉하고
파숫꾼을 세우고 3일 동안 지키게 부탁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도 12제자들과 같이
슬프고 실망하고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난 3년동안 일어난
일들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앞 일이 불안했다.
예수님이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은
물론 생각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에,
예수님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예수님
무덤으로 향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단지
이미 부패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발라드림으로서
합당한 장례를 치루어 드리는
것이었다. 무덤으로 향하면서
이 여인들의 관심사는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것은 무덤문에
도착하면 도대체 누가
돌을 굴려 주리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했을 때 벌써
돌은 굴려져 있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있었다.
두 마리아와 살로메는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물론 천사가 돌을
굴려놓은 이유는 예수님이
나가시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셔서
물리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요 20:19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모여 있을 때에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도 않고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셨다.
천사가 돌을 굴려놓은
이유는 이 여인들이, 그리고 나중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자신들의
눈으로 빈 무덤을 확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려워서 떨고 있는
이들에게 천사는 먼저 안심시킨다: 놀라지 말라.
그 다음 3가지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6) 그가 살아나셨고,
(7)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뵈오리라.
이 소식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알리시는 기쁜 소식이다. II. 1. 그가 살아나셨고. 천사가 전한 첫 번째
소식은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니라
는 것이었다. 요 11:25에서 말씀하시듯이,
예수님은 진정 부활이요
생명이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사단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말이다. 무덤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는 말이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우리에게 더 이상 죽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인간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다. 사망은 여전히
권세가 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슬프게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사망권세를 이기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가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사망은 현 세상에서만
일시적으로 권세를 부릴
수 있고, 사망보다
더 큰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것이기에, 사도 바울이
고전 15:55에서 힐문한
것과 같이 우리도 사망에게
힐문할 수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사망에게
외칠 수 있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너는 더 이상 나를 두렵게
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나를 쏘아도, 나를
아무리 찔러도, 나를
아무리 죽여도, 나는
오뚜기와 같이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니라! <아멘!>
<할렐루야!> 인생이
짧은 현 세상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에,
나는 지금 당장은 너에게
져서 현세에서는 죽지만,
곧 부활해서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이니라!
누가 마지막으로 웃느냐?
내가 웃는다! 예수님은 요 11:25-26에서 마르다에게
물으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신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가? 죽어도
살 것을, 영원히 살
것을 믿는가? <아멘> 기독교 신앙은 부활신앙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하나의
좋은 도덕/윤리 체계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공자와 석가모니 차원의
인간 성자에 불과하고,
교회는 좀 더 선하고/의롭게 살겠다는 사람들의
동호회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 사도바울이 고전
15:12-19에서 고백한대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우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했기에
우리는 가장 복된 자들이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고,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양자로 택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도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2.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천사의 두 번째 메시지는
“주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우리에
앞서(= 앞에서)
가신다는 말이다.
살아나셨고가 이미 일어난 일, 과거에 관한 메시지라면.
먼저 가시나니는 우리의 현재의 삶을
인도하는 메시지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다. 마 28:20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주님은 진실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면서(= 한 발 앞서 가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길을 여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보다
앞서 가시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세상의 운행자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우리의 생명과 건강이
내일 어떻게 변할지 전혀
모른다. 우리의 직장/일터가 내달/내년에
어떻게 될지 잘 모른다.
우리 자녀들의 미래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선하신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 가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반문하신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 물론, 주님이 앞서 가신다고
앞날의 모듯 것이, 앞길의 모든 것이, 다 좋고 순탄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무슨
일이 닥치건 겁낼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겪으신 선하신 주님이 먼저
가시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3. 거기서 뵈오리라 천사의 세 번째 메시지는
미래에 관한 메시지였다.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주님을)
뵈오리라“ 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에게 “뵈오리라”
는 아주 가까운 미래를 의미했다. 하루 이틀 만에
볼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거기”는 갈릴리,
곧 주님과 늘 함께 먹고
마시고 걷고 이야기 했던
그들의 고향을 의미했다.
실제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과
며칠을 같이 보내셨다. “거기서 뵈오리라”는
이 천사의 약속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다른 점이 있다면
“거기”가 갈릴릴가 아니라
천국이라는 것뿐이다.
주님은 우리들도 거기서--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 곳 (= 새 예루살렘)에서--주님을 뵈오리라고 하신다. 거기에 가면 전 교회가--모든 시대, 모든 세대를 통해 믿음을
지킨 자들이--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이고, 어린양의
혼인잔치 테이블에서 같이
먹고 마시게 될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은 거기서
뵈오리라는 분명한 소망,
주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들이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장례식을
치루면서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뿐 아니라 흰 양복에
흰 넥타이를 멜 수 있다.
찬송가 291장에서
고백하듯이, 우리는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4. 요약 그가 살아나셨고, 먼저 가시나니,
거기서 뵈오리라는 메시지는
천지개벽의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근원적으로
뒤집어진다. 나는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아났고,
지금 그 주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으며, 나중에
그 주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슬픈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찾고,
불안정한 삶 가운데서도
평강을 누리며, 절망스러운
상황가운데서도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다. 이제는
주님이 살아나셔서 나를
구원하신데서 오는 기쁨으로
살고, 주님이 앞서
가시면서 나를 인도하시는데서
오는 평강으로 살고, 주님을 천국에서 뵙게
되리라는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다. III.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현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님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이나
무덤 벽을 통과하여 나가시는
것을 본 사람도 없다. 물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본 사람도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은
많다. 그
하나는 빈 무덤이다. 빈 무덤은 누가 시신을
훔쳐갔던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이 부활했던지 둘
중에 하나를 의미한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의 주님을 본 증인들이
수없이 많은 것이다 (고전 15;5-8). 예수님은
먼저 이 여인들에게 보이시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다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나머지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500명의 믿는자들에게,
마지막으로는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또 다른 설득력 있는 증거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도망갔던
12 제자 모두가 목숨을
걸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11명이 순교당했고,
나머지 한 명 요한도
밧모섬에 유배되어 살았다.
살아나신 주님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그 주님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성경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쓰여진
것을 믿기에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기독교의 진리는
과학적으로 입증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약의 하나님이나
신약의 예수님이나 믿지
않는 자를 “과학적으로”
설득시키려고 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의 존재나
성령의 역사와 같은 영적인
일들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도 없고 논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과학과 이성이 손을 드는
바로 그 곳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활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둘
중에 하나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음으로 사망의 권세에
종노릇하며 괴로움과 슬픔과
절망 가운데 살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임으로 사망을
이기고 기쁨과 평강과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다른 모든 것은 의심했는지
모르지만 부활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했다면 사도행전
2:43-47에 기록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는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수 믿으면 부모형제와
친척과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온갖 불이익과 핍박을
당하고, 잡혀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는가?
그들은 부활신앙으로
살았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을 분명히 믿었고,
그 부활의 주님이 순간순간
자신들 앞에 먼저 가시면서
인도하시는 것을 믿었고,
나중에 주님을 거기서
뵈오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이러한 확고한 믿음으로
산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신앙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세상의 유행과 풍조를
따르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산다. 모든 사람들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으로
들어가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고집하며 산다. IV. 여러분은 오늘 부활절
예배에 나오면서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가? 혹시 예수님 무덤을 찾았던
이 여인들과 같은 마음으로
나오지는 않았는가? 부활신앙으로 살지 못하기에
여전히 지금까지의 삶에
대하여 의미를 찾지 못하고,
현재도 뚜렷한 목표가
없이 표류하는 삶을 살며,
불투명한 미래에 대하여
불안한 마음으로 나온 분은
없는가? 오늘 주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그가 살아나셨고,
먼저 가시나니, 거기서 뵈오리라. 원하옵기는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이제는
믿는 그대로 부활신앙으로
세상을 이기며 삶으로서,
영혼구원을 받은 자들답게
기쁨으로 살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답게 평강가운데
살며, 주님을 뵈올
자들답게 소망 가운데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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