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Living Aboveboard (1 Pet 3:13-22) 이따금 한번씩
말도 안되는 소송이 일어나서
뉴스거리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혹시 이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사는 어떤 사람이 아주 비싼
시가 담배(cigar)를 한
상자 샀다고 합니다. 그 다음 그는 담배를 화재보험에
들었습니다. 그 후
몇 달에 걸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시가 담배를 하나하나
다 피웠습니다. 그
다음, 그는 보험료를
한 번도 지불하지 않은 채
보험 회사에 피해 보상금을
청구했습니다. 그는
보험금 청구서에서 일련의
소규모 화재로 시가 담배를
잃었다고 진술했습니다. 보험회사는 지당한
이유를 들어 지불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정상적으로 시가
담배를 피웠다는 겁니다.
그는 소송을 했고,
이야기에 따르면,
승소했다고 합니다.
판결을 내리면서 판사는
말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보험회사에서
발행한 보험증서를 갖고
있고, 또한 보험회사는
시가 담배가 화재보험에
가입이 된 것을 확인하면서
무엇을 화재로 인정하는지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손실에 대하여
지불할 의무가 있습니다.” 보험회사는
오래 걸리는 항소 절차를
밟지 않고, 그에게
화재에서 잃은 시가 담배
값으로 $15,000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상금으로
받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자, 보험회사는 그의 보험
청구서와 이전 소송에서의
증언을 증거로 그를 24건의 방화죄로 구속시켰습니다.
그는 고의로 시가 담배를 태운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감옥 1년 형을 24년 연속으로 받을 것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 처럼 들리고
실제로 풍문에 불과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TV에서 듣고 신문에서 읽을
때 우리에게는 법정 소송의
전 과정이 소설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희망하기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상황 여하를 막론하고
법정은 피해야하겠다는
확신이 들어야겠습니다.
베드로 베드로 전서
기자가 오늘 말씀을 썼을
때는 법정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만, 비슷한
점은 있습니다. 그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라고 말하면서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CSI나 Law and Order, 그리고
이들을 모방한 범죄영화들에
중독된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오래 전에 Matlock, Barnaby
Jones, Cannon과 같은 인기 쑈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실제 법정에 가
본 적이 없지만, TV의
법정 쇼를 통하여 법정 상황이
어떤지 조금은 압니다.
증언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변론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베드로는
우리들 각자가 증인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증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드로는 오늘날 터어키에
해당하는 당시 5개
로마 관할 지역에 흩어져
있는 노예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들
중 일부는 불신자들과 결혼한
여인들이거나 불신자의
집에서 일하는 노예들이었고,
일부는 불신자들과
같이 일하는 장인들과 상인들이었습니다.
이 초대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믿음과 그에 따른
생활양식 때문에 또래들로부터
압력과 말다툼, 심지어는
적개심까지 직면해 있었습니다.
때로는 불신자들의
불쾌감이 분노로 변했는데, 그것은 크리스천의 모임에서
남녀가 죽은 사람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류의 험담은 종종
더 많은 학대와 위협을,
심지어는 폭력까지도,
불러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대
크리스천들이 되받아 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고. 대신 열심으로,
열광적으로, 결단코,
선을 행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들의 선행의 증거가
다가오는 해를 피하게 도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고난을 받을 때에 축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무고한 고난이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했듯이, 그들의 무고한
고난도 어떤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과 이웃들이
거침없이 해 대는 조롱과
괴롭힘과 학대에 겁을 먹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에게 고난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볼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의
소망에 대하여 말하고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가정과
일터와 이웃에서 늘 예수님에
대하여 변호하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되받아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변호하고
거리낌없이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해야 합니다. 한 판사가 있었는데
그는 재판석 앞에 선 전과범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심각성 때문에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3명의 변호사를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피고가
말했습니다: “변호사들은 신경쓰지
마십시요. 그저
좋은 증인 하나만 주십시요.” 제 생각으로는
그것이 세상을 향하신 예수님의
생각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세 명의
유창한 설교자를 한 명의
좋은 증인과 바꾸실 겁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증인,
그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좋은
증인이 됩니까? 글쎄요, 무엇보다도
증인은 개인적인 지식에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법정에서 증언을
하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우리는 문제가 되는
질문과 관련된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제공하는 모든 것은
소문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에 관하여 변호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물론, 믿음에
대하여 읽는 것과 우리의
믿음을 경험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신비주의자들과
같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기 위하여 매일 몇 시간씩
이상한 구절들을 외워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라는 것을 아는 느낌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 아플 때 의지하는
분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의 느낌이 있고, 또한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뜻과
길을 세상에 알릴 것을 택하셨다는데
대한 경이와 찬양이 있습니다. 좋은 증인의 두 번째
특징은 신빙성입니다. 증인을 믿을 수 없다면,
그의 증언은 별 가치가
없습니다. 오래 전
인터넸에 올랐던 이야기
가운데 번화한 거리에서
어떤 남자의 차를 바싹 붙어
따라가던 스트레스에 쌓인
어느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갑자가
신호등이 그의 앞에서 노란색으로
변하자, 그는 얼마든지
빨간 신호등으로 변하기
전에 교차로를 질주하여
통과할 수 있었지만, 옳게 행해서 건널목에서
섰습니다.
그러자 바짝 따라가던
여인은 분통을 터뜨리고
크락숑을 누르며 좌절감으로
비명을 질렀습니다. 교차로를 통과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아직도 고함을
지르고 있을 때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눈을 들어 보니
아주 심각한 얼굴의 교통경찰이
서 있었습니다. 교통순경은 그녀에게
손을 들고 차 밖으로 나오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는
경찰서로 끌고 갔는데,
거기에서 이 여인은
수색을 당하고, 지문을
찍히고, 사진이 찍힌
후, 후 감방에 수감되었습니다.
몇 시간 후, 경찰이
그녀의 감방으로 와서 문을
열고 접수대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그녀를 체포했던
경관이 그녀의 소지품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 차 바로 뒤에
막 섰을 때 당신은 크락숑을
누르고 앞 차의 남자에게
쉴새없이 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 차 범퍼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하는 스티커와
‘나를 따라 주일학교로
오세요’ 라는
스티커, 그리고 뒷 트렁크에
크롬으로 도금한 물고기
싸인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당신이
남의 차를 훔쳤다고 생각했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로서 믿을 만 합니까? 효과적인 증인이 되는
열쇠는 우리가 믿는 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물론 어떤 대의명분에
대해서도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효과적인 증인이 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뒤를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기 때문인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고문을
당했거나 죽음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말하면서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증거를
하는 모습은 우리가 행하며
산다고 하는 말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말해야 합니다. 분노와 경멸로
하는 크리스천의 증거로는
부족합니다. 베드로는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면서 “쓸데없이 고난을
받지 않으며 살라”고 합니다. “고난이 온다면, 사랑의 증거때문이지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도록
하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쓴
주 목적은 믿는 자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 주어서 믿음으로
인한 고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들로서 견디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증인된 삶에 있어서
시련을 견디는 열쇠는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마치면서
다음과 같이 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고난이 올 때에는 또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라.” 고난은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끌어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권능을
더 분명히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권고를
따를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다른 사람ㄷ르에게
보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증거를
더 강하게 호소력이 있게
하면서 동시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듯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요. 하나님을 당황하게 하는
크리스천들은 소망을 전하지
못합니다. 분노와
두려움과 절망을 전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권위자들에 대하여 혹독합니다.
그들은 냉소적이고
신랄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욕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이름을 지니고 다닙니다.
인생에 대하여 냉소적이기
쉽습니다. 한 번은
누군가가 냉소적인 말들의
목록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모든 삶에 비가 조금은
와야 하지만, 보통은
차 창문이 내려가 있을 때
온다” “이 땅은 당신의 땅, 이 땅은 나의 땅, 그러니 당신 자신의 땅에나
계시오!” “빗방울이 하나 떨어질
때마다, 꽃은 자라고,
건물의 기초는 새고,
야구경기는 취소된다.” “늘
시간을 내어 하던 일을 멈추고
장미의 향기를 맡으십시요. 그러면 조만간 코로 벌이
들어가게 될 겁니다.” “늘
새벽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은 이웃의 신문을 훔쳐야
한다면 그 때가 바로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보는 것도 또한 쉽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손도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또한 사랑은 증오보다 강하고,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며,
어두움과 부패와 파멸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을
변화시킬 능력을 잃은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실
것을 압니다. 신약의
하나님조차도 냉소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부활절의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는 살아나셨고
어느 날 모든 것을 통치하실
것이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베드로는
우리가 여러 번 들었듯이,
“예수님과 같이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행위로
하라고 합니다. 한
목사님이 있었는데 한 번은
짧은 장례식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장의사의 말에 따르면,
고인에게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그는
집집마다 다니며 행주와
다른 가재품을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살았고
남과 별 교제가 없이 살았습니다.
때때로 그는 이웃들에게
낙엽을 긁어 모아주거나
신문을 전달해주는 것과
같은 적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의 고객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일부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에게서
물건을 샀습니다. 마을 전역의 그의
고객들과 친지들이 조간
신문에서 그의 사망기사를
읽으면서, 자신의
경험들을 회고했습니다.
이웃들은 그가 행했던
적은 친절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신실하게 집집마다
방문했는지를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내가 장례식에 가야겠어”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2월의
추운 어느 날 공동묘지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겸손한 행상 세일즈맨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상상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의 행동이 말보다 설득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보십시요, 여러분은 특별한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분에게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증거했던 마지막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동료나 이웃에게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이야기 한 때는
언제입니까? 베드로가
요구하는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이야기 했던 마지막 때는
언제입니까? 이제는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우리 가족들과 친구들
가운데 살아갈 때에 그들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늘 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
||||||||||||||||||||||||||||||||||||||||||||||||||||
|
|
||||||||||||||||||||||||||||||||||||||||||||||||||||
|
|